나라사랑 컨텐츠 공모전
“나라사랑 콘텐츠 공모전”은 휘선 박윤식 목사의 저서 ‘근현대사 시리즈’의 내용을 영상, 글, 그림 작품으로 표현하여 올바른 국가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 시키고, ‘근현대사 시리즈’를 전파하기 위한 공모전입니다.

개인 - 글

“ 옛날을 기억하라! 구한말을 생각하라! ” 중등부 1-2 한담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은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반드시 그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하고 영원히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이정표이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하고 처량했던 식민통치와 수백만의 목숨이 희생된 6.25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80세가 넘었고 그 이후 세대는 대부분 그때의 비극을 알지 못하거나 옛날이야기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무관심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지나치게 왜곡되어 차마 눈을 뜨고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편향되고 좌경화되어 역사를 왜곡시켜 놓은채 이기적이고 단편적인 주장들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데 이것은 대한민국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서운 것임을 온 국민이 깨어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공산주의가 들어오게 된 시기는 일제강점기 였다. 그것이 급속도로 번진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였다. 우리나라의 공산주의의 태동은 일제 강점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면 역사를 잘 알아야 하겠다. 구한말 조정의 타락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국가가 망할 때는 반드시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며 그 배후에는 망할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먼저는 조선왕조 중기이래로 잠시 침체하였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영 .정조 시대의 중흥정지에 힘입어 다소 안정을 찾았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뒤... 19세기가 열렸다. 11세에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단일 가문이 관리 임용을 도맡아 요직을 독점한 정치다. 대체로 안동김씨의 일가가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심지어 왕까지도 멋대로 주무르게 된 것이다. 순조 말년에는 풍양 조씨가 그다음 헌종 때는 남양 홍씨가 세력을 잡는 등... 왕실의 권의는 추락할 때로 추락하여 국권이 갈수록 쇠약 해져갔다. 외척이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세도정치의 폐단과 국가재정의 고갈,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정국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조정에는 돈을 받고 벼슬을 시키는 매관매직과 특정 성씨 집안끼리 관직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세도정치의 공통점은 나라보다 가문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 있었다. 조선 말기 조정은 뿌리 깊은 당파 싸움으로 극도로 부패하였고, 숭문천무 정신만을 강조하여 글을 배우는 일만 중요시하고 무기를 비축하거나 군사력을 키우는 일은 무관심하여 부국강병에는 전혀 힘을 쏟지 않았다. 조정이 한동안 국방 강화에 힘쓰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된 일본은, 조정의 간사한 신하들을 금품과 돈으로 매수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계략을 하나하나 진행하고 있었다. 1863년...철종이 제위14년만에 후사없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이 12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이다.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은 10년동안 막강한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원군의 생부의 남원군의 무덤 도굴사건으로 서양인을 이적시하게되어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을 더 강화하여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못하고 10년간의 섭정을 하고 하야하였다. 이때부터 고종은 그의 처가인 여흥 민씨 일족과 그 주변 인물들을 관리로 대거 임명하면서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종의 할머니, 어머니, 부인, 며느리까지 모두 민씨였다. 개국정책을 추진하려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조선의 문호를 열려고 한 운요호사건이 일어났다. 1876년...강화도 조약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강압적으로 체결된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조선의 침투시키려는 일본의 의도대로 체결된 것이다. 이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개항을 이룬 듯했으나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정책의 관문을 열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12개의 강화도조약 조항중에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여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식민지화를 방해하는 청나라세력을 봉세하기 위한것이였다. 1882년...임오군란은 고종 19년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대우 봉급체불 군량미 미지급의 대한 불만이 폭발 하여 고간을 살해하는 난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조선 정부가 개화정책을 시작하면서 상당량의 미곡이 싼 값에 일본으로 유출되어 국내에는 미곡이 부족했고 농촌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민씨황후의 대립 황후가 20년간 집권하게 된다. 구한말 우리나라가 주권 침탈을 당한 주요인은 나라가 오랫동안 승문천무의 정신만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손에 의해 경영되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조선정부는 국력을 기르는 일에 너무 늦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할 때 동원한 우리 병럭은 2개 사단에 불과했다. 1882년...제물포 조약은 임오불란 으로 발생한 피해보상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군함 사척과 보병 한개 대대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저들은 제물포항에 도착한 뒤 국왕을 알현하고 일본측의 요구 조건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일본의 군함 히에이함상에서 일본군의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6개조항의 제물포 조약을 일사천리로 체결하였다. 일본은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1개 대대 병력을 한성에 파견하였는데, 자기들 경비는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공짜로 병영을 설치하였다. 실로 임진왜란 이후 처음 당하는 치욕이요 위협이었다. 청나라 또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우위권을 차지하려고 청나라 상인의 통산특권을 규정하는 등 조선의 대한 내정간섭에 적극적이었으며 조선에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을 확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갑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되었다. 1884년...갑신정변 고종21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계역사의 발전 방향의 따라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근대화를 꾀하였던 정변이다. 근대화의 방향은 제시하였지만 개화의 뜻을 이루지 못한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으로 개혁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끝까지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여 ‘문교부’를 설치하였다. 이일로 약260여 명의 민 씨를 다시 등용하였고 고종은 그 세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민 씨세력과 다른 세력이 서로 싸우게 되어 정국은 매우 불안하였다. 이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여 관료와 양반들은 평민들과 노비들을 착위하고 혹독하게 탄압하였다. 1894년...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무엇보다 일본 세력이 깊이 침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894년에 있었던 ‘동학혁명’과 그것을 빌미로 일어났던 ‘청일전쟁’ 이다. 동학혁명은 외세의 침입으로 성과를 얻지 못한채, 결과적으로 예기치 못한 청일전쟁의 발발 요인이 되었다. 1894년 6월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청일전쟁은 조선 땅에서 8개월이나 지속되다가 이듬해1895년 4월17일 청나라의 전권대표 이홍장과 일본의 전권대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그들의 야망대로 우리나라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기세로 식민지 정책을 펼치는 데 거침이 없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에 초래한 결과는 국가로서의 붕괴 그 자체였다. 1894-1896년...갑오개혁 1894년 6월 21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권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친일정부를 수립한후 강제로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새 정부는 일본군에 힘입어 세워졌고 일본이 20년 전 강화도 조약 때부터 조선의 독립을 고집한 이유는 조선 진출에 큰 장애물이었던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895년...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전쟁 이우 조선의 내정을 거의 장악하여 독주하고 있던 일본에 제동을 걸어 전면적인 반일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황후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러시아 공사 웨베르등 각국 공사의 후원을 요청하는 등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동양의 절세미인이요, 역사상 그 어느 왕후보다도 가장 현명하고 영특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에 최대의 장애요인이라고 단정했던 명성황후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한밤중에 기습, 칼로 난도질하고 살을 베고 뼈를 꺾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죽이고 가마니에 싸서 대궐 뒷산에서 불을 질러 나흘 동안 태워버린 큰 사변이다. 명성황후는 당시 일제가 당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진 여인으로 조선 침략의 가장 큰 장애물로 판단되어 일제가 치밀한 사전 계획하에 군화발로 조선의 안방까지 쳐들어와 이 나라의 국모를 가장 비참하게 죽였던 것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 온 국민의 어머니였다. 황후의 죽음은 곧 국가 패망이 암시와도 같았다. 일제가 무단침입하여 우리의 어머니를 뜰로 내동댕이쳐서 그 가슴을 군화로 짓밟고 수십 군대를 칼로 찔러 처참하게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으니 그 사체마저 욕보인것이었다. 실로 야수 같은 일제는 조선의 안방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민족은 유린당하고 그 비분은 터질 듯 하늘에 사무쳤지만 조선에게는 일제에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미우라 고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해한 명성황후가 궁궐을 탈출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임금을 협박하여 명성황후를 폐하여 일반 서민으로 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하였다. 아관파천... 황후의 야만적인 시해 다음날 고종은 ‘형편없는 의기소침의 상태’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으며 체통을 무릅쓰고 한없이 통분하여 울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독살의 위험 때문에 침식조차 자유롭지 못해 당시 선교사들이 매일 밤 당번을 정해서 두 세 사람씩 고종을 지키기를 7주 동안 계속하였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위장하여 가까스로 궁궐 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였다.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비우고 러시아공사관에서 거처하게 된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불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후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파면하면서 일본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대한제국공포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 국호를 대한이라 하고 대한제국의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고종 황제 즉위식을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분야에 있어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1896년 4월 7일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3개월 뒤 7월에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독립을 천명하는 상징물로 독립문이 세워졌는데 독립문에는 당시 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역강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 반석 위에 굳건히 세운다는 온 국민의 염원을 담은 글이 태극기 문양과 함께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할 것을 결정한 사실을 경축한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리고 모든 유럽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래서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 올해 2024년은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빼앗겼던 치욕의 한일합병 114주년 6 .25동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의 식민 치하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이후 민주 공산 좌우익의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장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1950년 6.25동란 만 3년 1개월 2일간의 전쟁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은 80%이상 초토화 되었었다...... 이토록 나라가 망가뜨려진 근본적인 원인은 공산주의 때문이다. 한 나라를 세우기도 어렵지만 나라를 지켜내기 또한 심히 어렵고 나라를 빛내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공산주의와 싸워 이기기 위해 큰 희생의 대가를 지불했다. 그렇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의 희생으로 힘겹게 지켜낸 우리의 대한민국이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에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제 나라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 곧 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한 가족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허락하신 우리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며 헌신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맹세합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 – 오명신 한국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곳이 가장 아픔으로 물들어 있다. 해방공간에서, 혼란과 암흑의 시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기억들은 그저 교과서의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1945년과 1948년 사이, 일제 강점기의 피지배 본성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유’ 민족이자, 문맹률이 심각하게 높던 우매하고 순수한 대중에게 들리던 목소리는 오직 언론의 목소리였다. 더 정확히는 언론 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들었던 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함께 들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해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서 하늘에서 해방이 뚝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언론은 빠르게 피어났다. 일제 강점기 동안 언론의 자유를 탄압받던 이들이 수면 위로 빠르게 떠 오르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수많은 행정시설이 주인을 잃은 채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 시설들을 점령하기 위한 움직임은 해방 직후부터 일어났다. 미군정이 진주하기 전, 행정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은 언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신문사와 방송사를 접수하려 했다. 당시 남한에는 신문사도, 방송사도 턱없이 부족했고,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당시 한글 신문을 발행할 만한 신문사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한글판인 매일신보뿐이었고, 건준은 그곳을 접수하려 했지만, 남아있던 일본인들에게 저지당했다. 그 후로 매일신보는 자치위원회가 발행했다. 신문사 접수에는 실패했지만, 우익 단체들과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 인쇄소를 선점한 건준과 조선공산당의 지원에 힘입어, 해방 직후에는 좌익 언론들이 먼저 그 꽃을 피웠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이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해방일보』, 『건국』 등등이다. 『조선인민보』는 해방 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의 좌익 기자들이 창간한 신문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의 기관지임을 자처하고 나서기도 한 좌익 신문이다. 『자유신문』은 이때의 흐름에 발맞추어 좌익적 성향을 지지하고 나선 신문이다. 당시 좌익 신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로, 후에 다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이 사건 이후에는 지하로 내려가 지하신문으로 발간되었다. 『건국』은 남로당의 기관지였다. 좌익 언론이 처음으로 저지를 받게 된 것은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미 군정장관의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부인 성명 발표 때문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건국준비위원회의 뒤를 이어 세워진 단체로,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무 동의 없이 여운형이 개인 의사로 넣은, 소위 유령단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인공이 정부를 발표하자, 아놀드 장관은 강력한 부인 성명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좌익 신문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자유신문』은 1945년 10월 13일에 “대중의 엄정한 비판 기다리는 아놀드 장관 발표 파문”이라는 제목으로 아놀드 장관의 성명에 대해 비판했다. 또 『매일신보』와 『조선인민보』는 성명서 게재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강력한 미군정에 대한 반발로, 몇몇 좌익신문은 며칠 동안 정간처분을 받았다. 또한 『매일신보』는 완전한 정간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후에 『서울신문』으로 다시 언론사에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좌익 언론이 움츠러든 사이, 그동안 좌익 언론에 눌려 있었던 우익 언론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1945년 말에는 대표적인 우익 언론이자 일제 강점기에 폐간 조치를 당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다시 발행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우익 언론들도 아놀드 장관 성명 사건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깨달은 미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커가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언론의 변화를 또 다른 성명 발표로 알 수 있다. 12월 12일에 미군정의 하지 육군 중장은 다시 한번 인공 부인 성명을 발표한다. 역시 인공은 비합법적이라는 과격한 내용을 담은 하지 중장의 성명은, 동아일보 등의 우익신문의 지지로, 아놀드 장관의 성명만큼 큰 비난을 받지 않는다. 언론이 국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드러내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에는 좌우익이 처음으로 부딪쳤다.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개최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세우고 신탁통치에 대해 합의한다는 내용이 보도된 것이다. 좌익은 소련의 입장을 따라 신탁통치에 찬성했다. 반면 이승만 박사를 필두로 한 우익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시위가 퍼져나갔다. 좌익 언론과 우익 언론도 처음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우익신문들은 신탁통치에 절대 반대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반면 좌익은 찬성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실었다. 이는 결국 국민들이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좌익의 민족적 진의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낳아, 우익 언론에 힘을 더하는 결과를 내었다. 신탁통치 반대 시위로 언론의 힘을 다시 실감한 좌익은 우익 언론사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당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이었다. 반탁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송진우 사장에 대해 친탁파가 보복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자신들이 밀리는 것을 확실히 느껴야지 할 수 있는 조치였다. 점점 우익 언론은 강성해졌다. 1945년이 지나고, 1946년에는 좌익 언론 몰락의 시작을 의미하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졌다. 계속 대중집회와 여러 활동을 벌여서 지지자와 당원을 늘려야 했던 조선공산당이지만, 해방일보라는 기관지 발행과 여러 자금 조달 수단으로도 그 많은 돈을 다 충당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해방일보 사옥이자 일제 강점기에 조선은행권을 인쇄하기도 했던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 이때부터 좌우익 언론간의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과격한 우익 청년단체들이 조선인민보, 매일신보 등 좌익 성향을 띄는 언론사의 사옥을 공격하기도 했고, 좌익이 우익 언론사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자신들의 책임을 덮으려 좌익은 계속해서 ‘미군정의 앞잡이’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기울 대로 기울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고, 신문과 정기간행물 간행이 허가제로 바뀌어, 좌익 언론의 힘이 다시 한번 풀썩 꺾였다. 해방 직후 인쇄시설을 선점해 대대적인 선전을 하고, 미군정마저도 신랄하게 비판하던 아놀드 장관 성명 사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이런 결과가 단순히 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우익 언론도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거쳤지만, 결국 진실과 대중을 위했기에 1946년에는 좌익을 완전히 누르는 상태까지 올라왔다. 이때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유엔에서도 그것을 계속 회의하고 조사단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했다. 좌익은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멈추기 위해 총선 이틀 전인 5월 8일, 동아일보 사옥을 불태우는 등 발악했지만 결국 단독선거를 이루어냈다. 이것 역시 언론을 딛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깨어 있는 언론인들이 모두 단독선거를 지지하고,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함께했기에 이룰 수 있던 쾌거였다. 모든 해방 공간에서 언론은 단지 언론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번 글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해방 직후에는 신문사 장악에는 실패했지만, 인쇄 시설을 선점한 건준과 조선공산당 때문에 좌익 언론은 계속해서 생겨났지만, 우익 언론은 인쇄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가 다시 발간되는 시기가 늦어지기도 했다. 대중은 좌익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문제가 10월 10일 아놀드 장관 성명 사건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좌익이 미군정을 건드린 것은 실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좌익 언론들은 상당한 제재를 받았다. 대표적으로는 매일신보의 정간이 있다. 동시에, 우익 언론들은 드디어 그 싹을 틔웠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창간이 그 시작을 알렸다. 그것을 또 다른 성명 사건인 12월 12일 하지 중장의 성명 사건의 반응으로 알 수 있다. 좌우익이 완전히 갈라진 건은 신탁통치에 관한 의견으로 인해서였다. 민족주의적 사상 속에서 우익 인사들은 죽어도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었고, 좌익 인사들은 소련에 따르느라 그런 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찬탁, 반탁을 두고 언론들은 신랄하게 싸웠지만, 대중은 반탁의 편이었다. 그 이후로는 우익 언론의 성장, 좌익 언론의 몰락과 발악의 반복이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거치면서 좌익 언론은 여러모로 시들해졌고, 민중의 마음도 좌익에서 떠났다. 이제 우익 언론의 힘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대중에게 올바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전했다. 그 여론의 흙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다운 무궁화가 피어났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해보자. 이 글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라고 명명한 언론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특히 해방 직후의 공간에서는 더더욱. 이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 순박한 농민이었고, 정치적 의식이 높다거나, 대세를 읽는 눈이 좋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치적 견해는 언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을 알던 언론들은 해방공간에서 소위 ‘언론전쟁’을 벌였다. 승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우익 언론이었다. 수많은 좌익 언론의 방해와 허위보도를 뚫고, 또 해방 초기의 열세를 딛고 우익 언론들은 올바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가? 단순히 역사일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든, ‘언론전쟁’에서 승리한 언론들 덕에 우리의 선조들은 비교적 바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신조이자 비전은 “세상을 보는 맑은 창, 신뢰받는 신문”이다. 신문은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 준다. 그러나 단순히 그 창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그 창에 보이는 풍경에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히게 된다. 배타적인 역사관만큼 무섭고 나쁜 것이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언론이 단순히 신문을 찍어내고 글을 쓰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언론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역사관을 세워 올바른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 간 토대다. 그리고 언론은, 그 역사를 보여주던 가장 잘 보이는 목소리이자, 보이지 않는 목소리이다.

마지막 세마디 '코레아 우라’ 소년부 모세2반 한온유 역사적인 1909년 10월 26일 날이 밝았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경.. 역사 안 찻집에 들어가 동정을 살펴보니 러시아 군인들과 출영객이 역사 안팎으로 들어차서 혼잡했다. 오전 9시쯤... 이토일행이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에 멈췄고, 마중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콥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후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와 수행원이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성공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외국영사단 앞으로 가 출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고,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날은 많은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붐벼서 별다른 제재나 검색 같은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다. 오전 9시 15분.. 군대가 경례를 붙이고 군악대 연주가 하늘을 울렸다. 이토가 귀빈들의 영접을 받으며 러시아군 의장대를 정면으로 하여 우측에서 좌측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촘촘한 의장대 사이로 맨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만 늙은이가 걸어나왔다. 러시아 병사들이 도열한 앞을 환영객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지나갈때 저것이 필시 늙은 도적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주저없이 그의 오른쪽 가슴을 쏘았다. 탕..탕..탕.....세발 모두 명중, 이토의 왼쪽 폐와 왼쪽 옆구리에, 그리고 오른팔을 스친 다음 뱃속에 머물렀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잘못하면 천하대사가 낭패라고 판단, 만전을 기하여 일본인 중에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들을 향해 다시 3발을 더 쏘았다. 일본인 하얼빈 총영사관 가와카미의 오른팔에,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의 복부에 남만주 철도회사 이사인 다나카의 왼쪽 다리에 박혔고, 그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치자 힘에 밀려 넘어지면서 권총을 떨어뜨렸던 안중근은 곧장 일어나 하늘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라는 뜻의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순식간에 하얼빈 역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열차 특실로 옮겨진 이토 히로부미는 과다출혈로 숨지고 말았다. 세 발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은 이토는 아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곧바로 절명하였다. 그의 나이는 69세였으며,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지 약 4년 만에 일이다. 안중근이 그토록 염원하던일, 조국을 만신창이로 만든 이 나라의 원흉, 국적 제 1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한민족의 기상을 세계에 보여 주었고, 핍박받는 식민지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잠들었던 민족의식을 일깨어 주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서로 환호와 찬사를 보냈으며 사람들은 감히 통쾌하다는 말은 못했지만 저마다 어깨가 들썩했고 서로 은밀히 축하하곤 했다. 이토를 처단한 안 의사는 생사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이토를 총살한 목적을 말할 때 한국 의병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죽인 것임을 일본 법정에서 떳떳하게 밝혔다. 하얼빈 일본제국 신문조서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안중근은 아무런 떨림도 없이 그 시대 제국주의의 가장 실세인 독재자 이토 히로부미의 파렴치함을 적나라하게 논리정연하게 답하여 일본인 재판관과 검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그 죄상은 어김없는 사실로 세상에 알려졌다. 안중근 의사가 말한 이토히로 부미의 15가지의 죄는 다음과 같다. 첫 째,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 째, 한국 고종황제를 폐위한 죄요 셋 째,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 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요 여섯째, 철도,광산,산림,농지를 빼앗은 죄요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여덟째,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요 아홉째,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 째,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한 죄요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열셋째,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넷째, 대륙침략으로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열다섯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순흥을 본관으로한 문성공 안향의 26대손으로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6살 때인1884년 부친이 김옥균,박영효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의 꿈을 포기하고 일가족을 이끌고 신청군 두라면 천봉산 밑청계동으로 은신한 후 이 산촌에서 성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집안에서는 안응칠이라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의협심과 무용력이 남달리 뛰어났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총을 잘 쏘고,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 명중시키는 명사수로 이름을 날리고 바른말을 잘 하여 17세에 번개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부친 안태훈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농민군 가운데 일부의 무리들이 마을로 들어와 일으킨 소요를 막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여 그들과 전투를 벌였고 을사늑약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몇 번이나 실신하다가 44세에 세상을 떠났다. 안중근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힘쓸 동포들을 모으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며 나라가 허물어 지고 멸망할까봐 비장한 심경을 피를 토하듯했다. 안중근은 상하이의 천주교 교회당에서 선교활동을 같이 한 프랑스인 르각신부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신부의 조언으로 국권회복으로 인해 계몽운동을 하기로 하고 육영사업과 교육구국운동에 전력을 기울이고 의병 조직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면서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여 대한독립을 위하여 헌신을 맹세할 수 있는 12인을 만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동의단지화 맹원 12인은 왼손 약지 첫 마디을 잘라 그 선혈로 태극기의 앞면에 대한독립이라고 쓴 후에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다. ‘오늘 우리들이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 그는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되고 유일한 동지였던 우덕순의 증언에 의하면,안중근은 “이건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라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국권침탈의 원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분골쇄신한 민족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안중근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안의사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이를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에.. 시모시자(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는 글을 실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사형 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네가 사랑하는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살려 달라고 구걸하면 양반집 체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제는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라는 말과 함께 아들의 수의를 만들어 보냈다. 1910년 3월26일 오전10시.. 아침부터 짙은 안개 속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전날 고향에서 보내온 흰색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은 안 의사는 간수 4명의 호송을 받으며 형장으로 끌려 나왔다. 여순 감옥생활 144일 만에 순국한다. 감옥 소장이 사형 집행문을 낭독하고 뭔가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것도 없으나 다만 내가 이토 히로부미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격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라고 말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었고 안의사가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간수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15분...안 의사는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이렇게 여순에 있는 감옥 교수형장에서 32세로 순국하였다. 두 동생은 대한독립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유해를 조국으로 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기억하며 감옥 밖에서 시신을 넘겨주기를 기다렸지만 감옥 소장은 끝내 안 의사의 유해를 주지않았고 묻힌 곳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유해를 돌려주게 될 경우 그가 묻힌곳이 곧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공동묘지 비슷한 분묘 속에 그의 유해를 감추어 버려 아직도 그의 시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순국전날 이천만 동포에게 남긴 안중근의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여한이 없겠노라. 대한독립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오로지 대한독립을 도모했던 그의 불굴의 투혼이 오늘날 독립을 이룩한 자유 대한의 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가슴에 다시금 선명하게 새겨지기를 소원합니다 ... 그는 보지못하고 죽었지만 우리는 지금의 자유가 거룩한 희생으로 누릴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또한번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라를 위해 매일 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근현대사 시리즈 1권을 읽으며 ......

오늘 여긴 빛에 젖었는데 고등부 2학년 장미희 해가 뜨는가 북쪽엔 볓빛이 쏟아져 내리는가 오늘 여긴 빛에 젖었는데 왜 그곳에선 총성만 들리우는가 꾸벅꾸벅 밤새워 꿈꾸는 가슴 벅착 만남에 산천이 동하고 만물이 요동친다. 어디에선가 불어치며 오는 시린 바람 그곳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가 박우물 꽝꽝 언 이 밤에 나는 잠을 깨어 기도한다 같은 하늘 쏟아지는 볓빛을 바라보길 해가 뜨는가 북쪽에도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올해 2월에 아빠가 갑자기 온 가족 모임을 만드셨다. 평일이었는데 저녁에 영화를 보자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꼭 봤으면 하는 영화라고 하시면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를 소개해 주셨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하시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기대했던 나는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 툴툴대며 영화관으로 갔다. 나는 우리나라의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뜨거운 나라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의 시대적 상황과 왜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대통령인지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태어났다. 이승만이 만19세일 때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4년 뒤 배재학당 졸업 후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는 러시아를 비판했다. 만민 공동회의 총대위원으로도 활약했다. 만민공동회가 조선을 뒤엎으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고발로 지도자들과 이승만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약6년 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됐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대에서 학사, 하버드대에서 석사. 프리스턴 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세계사의 흐름과 직결돼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40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나라의 해방과 직결돼있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이승만은 외교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승만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됐고 그해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자격으로 일본과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 독집정부가 세워졌음을 통보했고 미국의회에는 한국 독립안이 상정되게 했다. 국제연맹 회의에도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외쳤다. 1941년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라는 저서를 미국에서 출간했다. 일본의 패망을 미리 내다보고 한국의 독립을 예언하는 내용이었다. 그중 일본이 강해지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이 섬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상한 소리라고 했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미국은 이승만의 책도 주목했다. 세계정세를 내다보는 이승만의 안목이 다시 한 번 더 주목되는 시점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이승만은 지금이 대한민국이 미국정부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을 기회라고 판단했다. 미국정부도 이승만의 외교 활동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1943년11월27일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들이 카이로에서 회담을 한다.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약속되었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적당한 절차를 거쳐 자유 독립국가가 되게 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이 카이로 선언의 특별조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적당한 절차’라는 말에 의구심을 품고 미국 국무부에 편지를 보내고 성명서를 냈다. 훗날 이것은 강대국들이 한국을 일정기간 맡아서 통치한다는 신탁통치로 밝혀졌다. 신탁통치를 제일 처음 반대한 사람은 이승만 이었다. 1945년7월26일 포츠담 선언에서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이 이행돼야 한다고 해 한국의 독립보장을 재확인했다. 이승만의 끈질긴 외교의 결과물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저격하여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해방되었다. 일본은 완전히 철수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시급한 문제는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에 대한 처벌이었다. 1948년 9월 이승만과 새 정부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해 4.3 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등 공산당의 많은 사건들을 당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을 진압하지 않으면 한국이 망한다고 판단했고 국회를 설득해 반민특위를 해체했다. 그의 반공의지는 강력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공산화시키려고 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소련은 북한으로 들어가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인을 핍박하면서 공산당 조직 구성에 속도를 내고 1946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은 남북분단의 책임이 단독정부를 먼저 세운 남한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질적인 정부를 먼저 세운 것은 북한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한의 총파업, 군 반란, 시위를 주도하며 남한을 혼란스럽게 하고 스탈린과 협력해 6.25 남침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1945년 10월 뒤늦게 한국에 들어온 이승만은 이미 남한이 박헌영의 남로당이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고 온 나라가 공산주의로 기울어가고 있음을 보고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친일동조자들에게도 공무원직을 맡겼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그때까지도 남로당은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그러나 국가 보안법에 의해 남로당은 불법 조직이 되었다. 정부는 군 내부에 침투해 있는 남로당원들을 적발해내고 숙군했다. 당시 육군 총병력의 10%가 좌익 공산 세력이었다. 이로부터 1년 뒤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해 왔을 때 남로당원 1만 명이 국군 지휘관과 하사관으로 남아있었다면 국군은 완전히 붕괴되고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군이 참전할 겨를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36년만의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후 우리나라에는 국가적 난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남로당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국민 대다수가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돼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민들에게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단행한 농지개혁이었다. 이승만은 1950년 3월 10일 농지개혁법을 확정했다. 그 이후 농지개혁이 전면 실시되었다. 전국 농지의 70~80%가 농민들에게 분배 되었다.농민들은 크게 만족하여 농민들이 민심이 안정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미 남한 농민들에게는 지켜야할 자기 땅이 있었기 때문에 농지를 나눠 주겠다는 공산당의 선전은 무의미 하게 되었다. 이승만과 미국은 동맹이자 전략적 동반자였지만 한편으로는 긴장 관계였다. 한 일화로 6.25전쟁당시 적군이 대구까지 쳐내려왔을 때 미국은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절대로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다며 총을 꺼내들고 적군이 바로 앞에 올지라도 결코 도망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승만은 건국 직후부터 미국에 군사동맹체결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1949년5월 미군이 철군하자 이승만은 미국에 군사적 지원을 강력히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우호통상조약만 협의할 뜻이 있다고 제안한다. 이승만은 군사적 지원이 없는 조약은 큰 도움이 안 된다며 거부했다. 1950년 6월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고 1951년 7월 2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다. 이승만은 휴전을 결사 반대 하고 남한 단독으로라도 북진 통일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휴전을 하면 북한은 머지않아 다시 쳐들어 올 것이라며 이를 막으려면 한미 두 나라가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3년 10월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승만의 과감하고 뛰어난 정치 전략으로 한미상호 방위조약을 쟁취하였고 미국으로부터 경제부흥에 필요한 장기원조를 얻어내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 나라에 살면서 교회도 다닐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하며 살 수 있구나하는 감사한 마음이 생겨났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이 여자들에게도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과 여자도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부분이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성 감옥에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며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라가 있어야 가정도 있고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지킬 수 있다. 평강제일교회 성도라면 누구나 듣고 기억하고 있는 휘선 박윤식 원로목사님의 말씀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보니 왜 역사가 중요한지. 어린 우리들이지만 왜 역사를 바로 알아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워 이루어낸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신앙의 힘과 뜨거운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 우리나라의 진정한 건국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편지 고등부 1학년 이희진 새벽 세 시 칠흑같이 어둡고 새들의 날개짓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새벽입니다. 하지만 내 심장과 머릿속은 그 어느때보다 시끄럽습니다. 총성이 들릴 때면 제 심장은 저 총성보다 더 크고 빠르게 뜁니다. 저를 걱정하여 잠못드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모습, 다정스런 손길과 말씀 그러나 어머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저와 우리 나라가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살리기 위한 기도를 해 주셍. 만약 제가 살아 돌아간다면 어머니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습니다. 배가 너무 고프네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육탄 10용사 이야기 고등부 1학년 유지민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 지나간다. 한번 지나가면 옆에 선 전우들이 쓰러져간다’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간다. 안전핀 뽑기전 스치는 주마등 가족들, 친구들, 보고픈 사람들 내꿈, 내 바램, 나로써의 인생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나아간다. 지켜야 할 사람, 싸워야할 이유가 있기에 섭덕,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그리고 박창근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전우를 위해, 우리를 위해 한 희생에 감사한 마음 담아 불러봅니다.

우리는 기억하는가 고등부 1학년 김예원 우리는 과연 기억하는가 그들의 노력을 생각하는가 도시락을 먹을 때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였는가 교실 앞에 걸린 태극기를 보았을 때 유관순 열사를, 안중근 의사를,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였는가 반짝이는 별을 보며 쉴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밥을 먹고 교회에 올 때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