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목소리 – 오명신
한국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곳이 가장 아픔으로 물들어 있다. 해방공간에서, 혼란과 암흑의 시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기억들은 그저 교과서의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1945년과 1948년 사이, 일제 강점기의 피지배 본성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유’ 민족이자, 문맹률이 심각하게 높던 우매하고 순수한 대중에게 들리던 목소리는 오직 언론의 목소리였다. 더 정확히는 언론 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들었던 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함께 들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해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서 하늘에서 해방이 뚝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언론은 빠르게 피어났다. 일제 강점기 동안 언론의 자유를 탄압받던 이들이 수면 위로 빠르게 떠 오르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수많은 행정시설이 주인을 잃은 채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 시설들을 점령하기 위한 움직임은 해방 직후부터 일어났다. 미군정이 진주하기 전, 행정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은 언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신문사와 방송사를 접수하려 했다. 당시 남한에는 신문사도, 방송사도 턱없이 부족했고,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당시 한글 신문을 발행할 만한 신문사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한글판인 매일신보뿐이었고, 건준은 그곳을 접수하려 했지만, 남아있던 일본인들에게 저지당했다. 그 후로 매일신보는 자치위원회가 발행했다.
신문사 접수에는 실패했지만, 우익 단체들과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 인쇄소를 선점한 건준과 조선공산당의 지원에 힘입어, 해방 직후에는 좌익 언론들이 먼저 그 꽃을 피웠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이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해방일보』, 『건국』 등등이다. 『조선인민보』는 해방 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의 좌익 기자들이 창간한 신문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의 기관지임을 자처하고 나서기도 한 좌익 신문이다. 『자유신문』은 이때의 흐름에 발맞추어 좌익적 성향을 지지하고 나선 신문이다. 당시 좌익 신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로, 후에 다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이 사건 이후에는 지하로 내려가 지하신문으로 발간되었다. 『건국』은 남로당의 기관지였다.
좌익 언론이 처음으로 저지를 받게 된 것은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미 군정장관의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부인 성명 발표 때문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건국준비위원회의 뒤를 이어 세워진 단체로,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무 동의 없이 여운형이 개인 의사로 넣은, 소위 유령단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인공이 정부를 발표하자, 아놀드 장관은 강력한 부인 성명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좌익 신문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자유신문』은 1945년 10월 13일에 “대중의 엄정한 비판 기다리는 아놀드 장관 발표 파문”이라는 제목으로 아놀드 장관의 성명에 대해 비판했다. 또 『매일신보』와 『조선인민보』는 성명서 게재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강력한 미군정에 대한 반발로, 몇몇 좌익신문은 며칠 동안 정간처분을 받았다. 또한 『매일신보』는 완전한 정간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후에 『서울신문』으로 다시 언론사에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좌익 언론이 움츠러든 사이, 그동안 좌익 언론에 눌려 있었던 우익 언론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1945년 말에는 대표적인 우익 언론이자 일제 강점기에 폐간 조치를 당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다시 발행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우익 언론들도 아놀드 장관 성명 사건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깨달은 미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커가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언론의 변화를 또 다른 성명 발표로 알 수 있다. 12월 12일에 미군정의 하지 육군 중장은 다시 한번 인공 부인 성명을 발표한다. 역시 인공은 비합법적이라는 과격한 내용을 담은 하지 중장의 성명은, 동아일보 등의 우익신문의 지지로, 아놀드 장관의 성명만큼 큰 비난을 받지 않는다. 언론이 국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드러내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에는 좌우익이 처음으로 부딪쳤다.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개최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세우고 신탁통치에 대해 합의한다는 내용이 보도된 것이다. 좌익은 소련의 입장을 따라 신탁통치에 찬성했다. 반면 이승만 박사를 필두로 한 우익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신탁통치 반대 시위가 퍼져나갔다. 좌익 언론과 우익 언론도 처음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우익신문들은 신탁통치에 절대 반대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반면 좌익은 찬성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실었다. 이는 결국 국민들이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좌익의 민족적 진의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낳아, 우익 언론에 힘을 더하는 결과를 내었다.
신탁통치 반대 시위로 언론의 힘을 다시 실감한 좌익은 우익 언론사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당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이었다. 반탁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송진우 사장에 대해 친탁파가 보복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자신들이 밀리는 것을 확실히 느껴야지 할 수 있는 조치였다. 점점 우익 언론은 강성해졌다.
1945년이 지나고, 1946년에는 좌익 언론 몰락의 시작을 의미하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졌다. 계속 대중집회와 여러 활동을 벌여서 지지자와 당원을 늘려야 했던 조선공산당이지만, 해방일보라는 기관지 발행과 여러 자금 조달 수단으로도 그 많은 돈을 다 충당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해방일보 사옥이자 일제 강점기에 조선은행권을 인쇄하기도 했던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 이때부터 좌우익 언론간의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과격한 우익 청년단체들이 조선인민보, 매일신보 등 좌익 성향을 띄는 언론사의 사옥을 공격하기도 했고, 좌익이 우익 언론사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자신들의 책임을 덮으려 좌익은 계속해서 ‘미군정의 앞잡이’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기울 대로 기울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고, 신문과 정기간행물 간행이 허가제로 바뀌어, 좌익 언론의 힘이 다시 한번 풀썩 꺾였다. 해방 직후 인쇄시설을 선점해 대대적인 선전을 하고, 미군정마저도 신랄하게 비판하던 아놀드 장관 성명 사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이런 결과가 단순히 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우익 언론도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거쳤지만, 결국 진실과 대중을 위했기에 1946년에는 좌익을 완전히 누르는 상태까지 올라왔다.
이때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유엔에서도 그것을 계속 회의하고 조사단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했다. 좌익은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멈추기 위해 총선 이틀 전인 5월 8일, 동아일보 사옥을 불태우는 등 발악했지만 결국 단독선거를 이루어냈다. 이것 역시 언론을 딛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깨어 있는 언론인들이 모두 단독선거를 지지하고,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함께했기에 이룰 수 있던 쾌거였다. 모든 해방 공간에서 언론은 단지 언론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번 글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해방 직후에는 신문사 장악에는 실패했지만, 인쇄 시설을 선점한 건준과 조선공산당 때문에 좌익 언론은 계속해서 생겨났지만, 우익 언론은 인쇄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가 다시 발간되는 시기가 늦어지기도 했다. 대중은 좌익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문제가 10월 10일 아놀드 장관 성명 사건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좌익이 미군정을 건드린 것은 실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좌익 언론들은 상당한 제재를 받았다. 대표적으로는 매일신보의 정간이 있다. 동시에, 우익 언론들은 드디어 그 싹을 틔웠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창간이 그 시작을 알렸다. 그것을 또 다른 성명 사건인 12월 12일 하지 중장의 성명 사건의 반응으로 알 수 있다.
좌우익이 완전히 갈라진 건은 신탁통치에 관한 의견으로 인해서였다. 민족주의적 사상 속에서 우익 인사들은 죽어도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었고, 좌익 인사들은 소련에 따르느라 그런 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찬탁, 반탁을 두고 언론들은 신랄하게 싸웠지만, 대중은 반탁의 편이었다.
그 이후로는 우익 언론의 성장, 좌익 언론의 몰락과 발악의 반복이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거치면서 좌익 언론은 여러모로 시들해졌고, 민중의 마음도 좌익에서 떠났다. 이제 우익 언론의 힘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대중에게 올바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전했다. 그 여론의 흙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다운 무궁화가 피어났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해보자. 이 글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라고 명명한 언론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특히 해방 직후의 공간에서는 더더욱. 이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 순박한 농민이었고, 정치적 의식이 높다거나, 대세를 읽는 눈이 좋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치적 견해는 언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을 알던 언론들은 해방공간에서 소위 ‘언론전쟁’을 벌였다. 승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우익 언론이었다. 수많은 좌익 언론의 방해와 허위보도를 뚫고, 또 해방 초기의 열세를 딛고 우익 언론들은 올바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가? 단순히 역사일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든, ‘언론전쟁’에서 승리한 언론들 덕에 우리의 선조들은 비교적 바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신조이자 비전은 “세상을 보는 맑은 창, 신뢰받는 신문”이다. 신문은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 준다. 그러나 단순히 그 창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그 창에 보이는 풍경에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히게 된다. 배타적인 역사관만큼 무섭고 나쁜 것이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언론이 단순히 신문을 찍어내고 글을 쓰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언론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역사관을 세워 올바른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 간 토대다. 그리고 언론은, 그 역사를 보여주던 가장 잘 보이는 목소리이자, 보이지 않는 목소리이다.